정두언 전 의원 사망원인은? 정두언 유서, 나이, 학력, 우울증, 재혼, 부인, 이명박 전 대통령 저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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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7. 16. 23:35
16일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정치권에서 애도와 추모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음식점 사장', '프로 가수', '방송인', '시사평론가'까지 다양한 변신을 거쳤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정두언 전 의원이 62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치인이 아닌 방송인, 그리고 음식점 사장으로 '인생 2막'을 새롭게 설계했던 정 전 의원이 16일 오후 유서를 남긴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경찰은 정 전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두언 전 의원은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정 전 의원은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을 끝으로 정치권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2000년 한나라당 대변인에 이어 2002∼2003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정 전 의원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부터 19대 총선까지 서울 서대문을에서 내리 당선됐습니다.
초선의 정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당에 아무런 뿌리가 없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대통령 만들기에 거의 유일하게 앞장섰습니다.
결국 2007년 말 정권 교체에 성공한 정 전 의원은 개국 공신으로서 '왕의 남자'로 우뚝 섰고 대통령직 인수위 구성과 조각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하며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듯했지만, 권력의 암투가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인수위에서 밀려나온 정 전 의원은 2008년 6월 '만사형통'(모든 것은 형으로 통한다)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막강했던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과 그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당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을 겨냥해 '권력의 사유화' 발언으로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앞서 이미 그해 4월 제18대 총선에서 이 전 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 파동'의 선봉에 서면서 여권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개국 공신이었지만 정권 말기인 2012년에는 '저축은행 금품수수' 사건에 연루됐습니다. 급기야 이듬해에는 3선 의원 신분으로 법정 구속까지 이뤄져 구치소에서 꼬박 만 10개월을 살며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모두 정치 인생이 끝난 것으로 예상했지만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극적으로 부활, '국회의 꽃'으로 불리는 상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대문 을에 다시 출마했지만 4선 달성에는 실패했습니다.
낙선 이후에도 종편 채널의 시사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때로는 패널로서 종횡무진했던 정 전 의원은 정치인이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정 전 의원이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정 전 의원의 전 보좌관 송주범씨는 이날 오후 정 전 의견 발견 현장인 서울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에서 취재진과 만나 "예전 인터뷰에서도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며 "우울증이 좀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송씨는 "여러가지로 마음이 그러신 게 있었다"면서 "예전 인터뷰한 것 보면 다 나와있다"고 전했습니다.
정 전 의원은 지난 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2016년 낙선 당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실을 고백하며 이후 심리상담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습니다.
정 전 의원 부인은 남편이 자택에 유서를 써놓고 서울 홍은동 실락공원 인근으로 나갔다고 경찰에 신고하였고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드론과 구조견을 투입해 실락공원 인근을 수색, 북한산 자락길에서 정 전 의원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경찰은 "가족에 미안하다는 취지의 유서가 자택에서 발견됐다"며 "유족 뜻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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