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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형 사건의 도주극에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 것은 탈옥수 신창원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창원의 도피행각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활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창원은 지난 1997년 1월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뒤 2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며 경찰을 따돌렸습니다.

다방종업원 9명, 주유소 종업원, 술집 종업원, 윤락녀 각 1명 등과 교제하며 이들을 애인이나 부부로 위장한 것입니다.

그는 도주 기간 중 10억원가량의 돈을 절도했는데, 이 돈으로 빚이 많은 술집 여자 종업원을 유혹한 뒤 그 집을 은신처로 삼는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1997년 4월부터 교제한 다방 종업원 전 모 씨와는 8개월을 함께 생활하며 주위의 이목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신창원에게 여성은 경찰의 의심이나 추적을 피하는 방어 수단이었던 셈인데 그가 검거된 곳 역시 동거녀의 자취집이었습니다.



이 여성들은 신창원이 검거된 이후에도 그를 걱정했습니다. 마지막 동거녀였던 김모씨는 “신창원은 탈옥수였지만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였다”며 “면회를 갈 수 있느냐”는 말을 했었습니다.

신창원의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했던 강 모 씨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창원을 걱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신창원은 붙잡힌 뒤, 여성들과 계속 동거를 했던 이유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도피로 인한 불안과 고통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여자와 함께 지내면서 위안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다른 프로파일러는 “검거 당시 신창원은 도주를 위한 도구로 여성을 이용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기대려는 측면이 강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창원은 차량을 버리고, 번호판을 바꿔 달기도 했습니다. 검거 후 당시 신창원의 차 안에선 충남과 충북, 대전, 경기, 서울 등 중부권과 수도권 지역의 승용차 등 번호판 15개가 발견됐습니다.

신창원은 전북 정읍 신태인에서 순창과 임실, 남원을 거쳐 경남 하동까지 낮에는 산에서 자고 밤에만 이동하는 식으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습니다.



신창원은 1967년 5월 전북 김제군 금구면 하신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김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가난한 집안사정 등으로 2학년 때 중퇴하였습니다. 15세인 1982년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혀 소년원에 들어갔고 소년원에서 나온 다음 해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역 주변 유흥가에서 음식점 배달원 등을 전전하면서 1983년 절도죄로 다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989년 3월 24일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 정모 씨 집에 침입, 정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습니다. 그 해 9월 검거되어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서울구치소와 청송교도소 등을 거쳐 1994년 11월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1997년 1월 20일 교도소 감방 화장실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후 도피생활을 하는 중에도 108건의 강도와 절도를 저질러 9억 8000여 만 원을 빼앗았습니다. 이 돈을 이용하여 다방 여종업원 등 유흥업소 종사자를 유혹하여 동거장소를 은신처로 삼았습니다. 신창원의 도피기간 동안 경찰수사의 공조부재, 주민신고 무시 등 고질적인 허점이 드러났으며, 많은 경찰관이 체포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경찰에서 물러났습니다.



1999년 7월 16일 텔레비전 수리의뢰를 받고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 들어갔던 기술자의 제보로 검거될 때까지 2년 6개월 동안 신창원은 경찰의 수사망을 뚫고 전국 각지로 출몰하며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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